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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긍정의 힘! YES 문경!

주암정

주암정

산북면 서중리에 위치한 주암과 주암정

산북면 서중리에 위치한 주암과 주암정

배위에 정자가 홀연히 서있네

문경 땅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구곡(九曲)이 많다. 가은읍에 선유구곡, 농암면에 쌍용구곡, 문경읍에 화지구곡, 산양면과 산북면을 걸치는 석문구곡이 그것이다.

구곡이 많다는 것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 말과 부합된다. 왜냐하면 구곡원림(九曲園林)은 반드시 아름다운 풍광이 어우러진 계곡이나 빼어난 골짜기에 자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멋진 바위와 숲 등에 의해 형성된 아름다운 곳에 구곡이 설정되며, 대체적으로 그 지점은 굽이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구곡의 경치는 대체적으로 배를 타고가면서 완상하는 것이 제격이나, 상황에 따라 숲을 따라가면 감상을 하기도 한다.

문경의 구곡 중 가장 긴 코스이기도 한 석문구곡 중 2곡에 해당하는 주암은 구곡의 기본 형성 항목에 아주 적합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지형이 변해 흐르는 물에 있지 아니 하지만, 과거에는 굽이치는 물에 마치 석선(石船)이 강을 거꾸로 오르는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산북면 서중리에 위치한 주암과 주암정

주암을 처음 대하는 느낌은 보는 순간 “아! 물위에 배가 지나가고 있구나” 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바위가 분명 배 모양을 하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 마저 드러낸다. 대한건축학회에 기고한 대구 카톨릭대학교 조경학과 안계복 교수의 “경상지역:암정으로서의 주암정에 대한 소고”에 실린 주암정에 대한 내용에 의하면

“작은 맞대 일각대문이 서쪽으로 나 있고 정자는 북서향을 하고 있다. 향이 북서향인 이유는 기문에 나타난 것처럼 ‘배 모양의 큰 바위가 언덕에 정박하여 오랫동안 매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형상을 살린 정자를 지어 이러한 경관을 살리면서 접근하기 위해서는 서쪽으로의 진입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정자 건물은 북서향을 향하도록 결정한 것으로 보이며 남향을 고집하기보다는 경관적인 측면을 더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암정에 올라보면 금천이 굽이쳐 내려오는 모습이 먼발치서 보이며, 강 건너에는 인천채씨 집성촌인 현리마을과, 근품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주암 위에 있는 주암정

산북면 서중리에 위치한 주암과 주암정

주암 위에 있는 주암정

정자 건물의 기단 높이는 대개 30∼35cm 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주암정은 암반의 선실 부분에 정자를 세웠기 때문에 기단 없이 막돌로 초석을 놓았으며 종고(마루 높이)도 90cm 정도가 일반적이나 주암정은 43cm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주암정 주변은 금천을 사이에 두고 경체정이 있으며, 주암정 바로 뒤편 산 언덕에는 도천사지라는 큰 절터가 있었다. 도천사지에 있던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는 현재 8교구 본사인 직지사로 옮겨져 있으며, 웅연서원은 옛터에 비석만 덩그렇게 세워져 있다.

금천을 거슬러 석문까지 가고 싶네
주암정 현판

주암정 현판

주암정은 주암(舟巖) 채익하(蔡翊夏,1573-1615,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인천채씨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주암정기를 토대로 살펴볼 때 대체적으로 지금으로부터 70여년전인 1944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여진다. 건물 양식은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아담한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대청의 전면에는 4분합 들문을 설치하여 마루와 방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마루방을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전면으로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툇간의 전면에는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가구는 오량가의 홑처마집이며 전면 기둥의 상부에는 초익공으로 장식하였다. 건물은 매우 잘 관리되고 있으며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차양을 하기위해 처마에 양철을 달아낸 것이 흠이라면 흠이라 할 수 있다.

주암 채익하 선생은 자(字)가 비언(?彦), 호(號)가 주암(舟巖)으로 나재(懶齋) 채수(蔡壽, 1449~1515) 선생의 6세손이며 교위(校衛) 채극명(蔡克明)의 아들이다.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며 학덕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후손인 채홍탁(蔡鴻鐸)이 지은 ?주암정기(舟巖亭記)?에서는 주암정이 지어진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주암정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모습

주암정에서 우측으로 바라본 모습

웅연(熊淵)의 남쪽에 큰 바위가 있어 형상이 배와 같은데 벼랑을 다듬어 길게 매어놓았다. 옛날에 우리 선조 상사(上舍) 부군(府君)이 일찍이 시내를 거슬러 오르며 노닐고 즐기면서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붙였다. 이로 인해 주암(舟巖)으로 이름하였으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 후에 이 바위를 지나며 노닐던 일들이 모두 사람은 갔지만 이름은 남아있게 되었다.

熊淵之南有大巖形如舟而治崖長繫昔吾先祖上舍府君嘗??遊賞題詠寄意因以舟巖爲標號竟未?
志而早世後之過此巖遊此巖者咸有人去名存之盛

측면에서 본 주암정 전경

측면에서 본 주암정 전경

뒷날에 집안 일로 인하여 모임을 가졌는데 사손(嗣孫)인 종진(宗鎭)씨가 정색을 하고 나에게 말하기를 “대범한 사람은 선조의 평소에 다니던 곳이라도 오히려 그 유적을 보호하여 혹 글씨를 새기고 집을 지어 기념을 표하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이 바위는앞 세대에 뜻을 붙인 곳임에랴. 마을에 머물러 살아갈 때 날마다 접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어찌 한 집을 경영하여 바깥에 머물며 우러러 사모하길 견씨가 정자를 생각하는 듯이 하지 않겠는가?”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옳도다. 옳도다. 다만 각 집안이 힘이 약해크게 베풀 수 없어서 대대로 다만 마음으로 경영할 뿐이었다. 만약 다시 일을 시작한다면 어찌 내년이 올해이고 또 내년이 올해가 되겠는가?” 하였다.

日因門事而會嗣孫宗鎭氏?然語余曰大凡人於祖先尋常行過之處猶尙保護其遺?
或題刻焉建築焉以表記念者多況此巖先世之所寄意處在里?之停起居動靜無日不相接則?
經始一屋外寓羹慕如甄氏思亭乎余曰是哉是哉但各家綿力不能巨張以至歷世而徒爲心上營者也若復延?
則焉如夫明年如是又明年亦如是耶

주암정 전경

주암정 전경

주암정 정면 네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다.

舟巖萬古泛錦川 주암만고범금천 주암은 금천에 만고를 떠 있고
絶壁橫松倒立奇 절벽횡송도입기 소나무는 절벽에 넘어질 듯 매달렸네.
顯祖醉月遊賞處 현조취월유상처 그 선조가 달에 취해 노닐던 자리에
賢孫羹墻築小亭 현손갱장축소정 어진 후손 작은 정자 세워 추모의 정을 더하네.

500여년전 주암 채익하 선생은 이곳에서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때로 돌아가 주암선생을 만나지 않더라도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하다. 자신만의 공간을 아름답게 가꾸고, 주변사람들과 함께나누는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에 순응해, 자연과 함께하는 공간의 형성이야 말로 진정한 선비의 안빈낙도에 대한 개념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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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과 (054-550-6408)
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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