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을미의병
문경의병부대의 창설
일제의 을미사변으로 운강 이강년은 격분을 견디지 못하고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이제 나라는 영 망하였다. 억만인의 백성이 모두 짐승이 되고 오백년 예의의 나라가 오랑캐의 것이 되고 말았구나! 수 천 년 성인의 도리가 더러운 땅이 되었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사생화복(死生禍福)을 돌아 볼 겨를이 없다.”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평소 친분이 있어 가까이 사귀던 판서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인근의 유림들과 동지들에게 기병의 뜻을 전하는
한편,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사촌 이강수에게서 2백냥을 받아서 무기를 마련하였다.
운강은 1896년 2월 23일 유림인사들의 문중과 산포수, 농민군 등으로 문경 가은 도태장터에서 창의하였다.
그리고 기병의 동기와 목적을 자세히 설명하고 의병봉기의 당위성을 천명한 다음 창의대장에 올라 의병의 편제를 정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창의 당시 참여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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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인 | 참여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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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 가은인 | 이강초, 강병수, 신 기, 이강수, 이승재, 심거벽 |
박일교, 신경희, 장복삼, 신태원, 장경한, 황부교 | ||
김덕용, 김만식, 이제재, 김정진, 김양한, 조기봉 | ||
임재진, 김원한, 김신윤, 오태섭 | ||
농암인 | 서종국, 김병후, 권복제, 서상업, 김인성, 안재덕 | |
윤명구 | ||
충북인 | 박문영, 이종국 | |
상주인 | 이민수, 김성옥, 김만원 | |
안동인 | 권재중, 이만홍, 채상진, 유사연, 정재덕 | |
영천인 | 심장섭 | |
풍천인 | 김성직 | |
기 타 | 배상균, 한태섭 |
문경에서의 활동

부대 창설지, 전투지역, 주요 주둔지, 이동방향 등을 나타낸 초기 문경의병부대 활동도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농암 장터에 창의소를 설치한 문경의병부대는 먼저 친일 관료 안동부관찰사 김석중 등 3인을 처단하여 창의의 명분을 드높였다. 그리고 권세연의 안동 의병진과 연합하여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문경의병부대는 작전상 수비하기가 용이한 고모성(姑母城 : 麻姑城)으로 이진하여 호좌의병부대의 유인석 의병장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군 병참기지 공격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2월 27일 원병이 오기도 전에 적이 쳐들어와 6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문경의병부대는 제천으로 이동, 3월 12일 유인석의 호좌의병부대와 합진하였다.
유격장 이강년의 활동
호좌의병부대의 유격장이 된 이강년은 먼저 수안보의 일본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조령 일대를 장악하고자 하였다.
1896년 3월 19일(음력2.6) 이강년은 전군장 홍대석 부대와 함께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견고한 방어태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창방면으로 퇴군하였다. 3월 26일(음력 2. 13)에는 중군장 윤기영 부대와 함께 조령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여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 · 탄환 · 유황 · 조총 등 62점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장기렴의 관군이 남한산성의 의병부대를 격파하고 충주로 이동, 가흥의 일본병참부대와 합세하여 제천의 호좌의병부대를 공격하였다.
호좌의병부대는 5월 25일 장기렴의 군대와 맞서 제천 남산성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많은 희생을 내고 참패하고 말았다.
남산 방어선이 무너진 후 제천의병부대는 단양에서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영월 · 정선 · 평창을 거쳐 관서지방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유인석을 중심으로 한 일부 병력은 만주로 넘어가 후일을 도모하였다.
운강은 후군 부대를 이끌고 호좌의병부대의 후미에서 관군의 추격을 막게 하는 가운데 영월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어려워져 8월에 소백산중으로 들어가 군사를 해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