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정미의병
전기의병
이강년 의병부대의 재봉기
1896년 의병 해산 이후 운강 이강년은 단양 금채동에 은거하면서 재기를 위한 준비를 도모하였다. 또한 요동에 망명한 스승 유인석을 찾아가 위정척사사상을 심화시켰으며, 문인들과 함께 의병 재기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1905년~1906년 사이에는 강원·충북·경북·경기 지역을 두루 돌면서 애국지사를 방문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국 식민지화의 야욕을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전쟁에 이기자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트집 잡아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8월에는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온 국민으로 하여금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소식을 들은 운강 이강년은 의병 재기를 결심하고 각지의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해산된 원주진위대로부터 신식무기를 받아 마침내 재기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이 즈음 광무황제의 비밀칙령이 내려져 의병부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한편, 의병부대는 군대 해산으로 의병진에 합세한 군인들로 인해 더욱 조직화된 의병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오호라! 짐의 죄가 크게 차서 황천이 돕지 않노라. 이로 말미암아 강린(强隣)이 혼란을 일으켜 엿보고 있고 역신이 정권을 농락하여 사천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가 하루 아침에 견양(犬羊)의 것이 되었노라.
짐의 한 오라기 목숨은 애석할 바가 없으나 오직 종사와 생령을 생각하니 애통하여 이에 선전(宣傳) 이강년으로 하여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칠로(七路)로 보내오노라.
양가자재로 하여금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소모관으로 삼아 인부(印符)를 자각하여 종사하게 하노니 만약에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수령 등을 먼저 참하고 파출(罷黜)하여 처분하라.
기보(畿堡)를 보존하는 한 오라기 희망이 이도체찰사(李都體察使)가 사직에 순(殉)함에 달렸노라.
이에 새서(璽書)를 비밀히 보내니 이를 다 알아서 거행하라.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다.
1907년 7월 의병전쟁을 재기한 운강은 원주 신목정에서 군례를 받고 남진하여 제천에 입성하였다. 이때 제천으로 모여든 의진수는 40개가 넘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여 대규모 의병부대를 형성하였으며 일제 토벌군과 제천 천남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전과를 올렸다. 이에 일제는 의병들의 근거지이고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로 제천 일대 민가를 모조리 소각하여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천 전투 후 각 부대는 북상하여 영월 주천으로 이진하였다. 이곳에서 40 여명의 부대장들은 통일된 지휘체제를 위해 운강은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다.
마침내 운강은 주천 강가에 단을 쌓고 대장직에 올라 장병들의 군례를 받고 광무황제의 밀지를 읽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운강은 전기 의병에서 볼 수 없었던 14명의 참모부를 두어 부대 운영과 조직상의 체계 및 향후 이동 방향 등 작전을 계획하였고 운강 다음의 최고 지위인 도총독장으로는 이만원을 임명하여 군중의 대소사를 합심하여 보았다.
또 중군장을 장임부의 최고 장수로 두어 효과적인 전투를 도모하였다.

- 대장 이강년
- 도총독장 이만원
- 중군장 김상태
- 실전부대(장임부)(종사부68명)
- 좌선봉
- 우선봉
- 도선봉
- 중군선봉
- 전군장
- 후군장
- 좌군장
- 우군장
- 유격장
- 척후장
- 독전장
- 금전장
- 후식장
- 좌식장
- 포장
- 인솔·훈련·군량(좌종사부 98명)
- 영솔장
- 부영솔
- 부교련관
- 수문장
- 도련장
- 방수장
- 감교장
- 군량관
- 실전부대(장임부)(종사부68명)
- 참모부 이정규 이하 14명
- 참모총독장
- 소모장
- 참모관
- 소모
- 참모 겸 사서
- 소모
- 사서
- 소모
의병전쟁의 확대
부대를 정비한 의병부대는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북상하기 전까지 약 4개월간 충청 · 강원 · 경상도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군과 치열한 의병전쟁을 수행하였다.
운강 부대는 1907년 8월 23일 민긍호의 원주부대, 조동교의 청풍부대와 연합하여 충주성을 공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문경지역으로 진격, 조령 일대를 장악하여 의병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조령 일대를 장악한 의병부대는 9월 10일 갈평에서 적의 대군을 섬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또 9월 25일에는 영춘 느릅재로 넘어오는 일본군을 맞이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10월 22일에는 원주 싸리재에서, 11월 2일에는 죽령에서 2차에 걸친 대회전을 벌여 승리하였다.
11월 10일에는 단양 고리평에서, 11월 28일에는 백자동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 13도창의군이 결성되자 운강 의병부대는 서울 진공작전을 위해 경기도 지역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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횟수 | 년월일 | 전투지명 | 의병측 기록『창의일록』 | 『창의사실기』에 나타난 일본군 피해 | 일본측 기록·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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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피해 | 일본군 피해 | 의병 피해 | 일본군 피해 | ||||
1 | 1896.2.27 | 문경 고모성 | 사망 1 | ||||
2 | 3.19 | 수안보 남산 | 사상자 다수 | ||||
3 | 5.23 | 제천 남산 | 사망32 | 단양 용소동 | 부상 1 | 부상 1 | |
4 | 1907.5.27 | ||||||
5 | 8.15 | 제천읍 | 사망 500 | 사망 10 | 사상자 20 | ||
6 | 9.7 | 문경 주흘리 | 도주 | ||||
7 | 9.9 | 문경 조령 | 사망 32 | 격멸 | |||
8 | 9.10 | 문경 갈평리 | 사상자 다수 | ||||
9 | 9.11~13 | 문경 기타 | 부상 3 | 사망 7 | |||
10 | 9.15 | 문경 적성 | 사망 36 | 사망 15 | |||
11 | 9.25 | 단양 영춘(1차) | 도주 | 사상자 50 | |||
12 | 10.12 | 괴산 연풍 | 부상 1 | 사망7, 포로3 | |||
13 | 10.22 | 원주 신림 싸리재 | 사망 200 | 사망 5 | 사망 30 | 사망 2, 부상 2 | |
14 | 11.2 | 죽령 1차, 응암 | 사망 30 | 사망 6 | |||
15 | 11.6 | 죽령 2차, 응암 | 격퇴 400 | 격퇴 8 | |||
16 | 11.10 | 죽령 3차, 고리평 | 부상 10 | 사망 80 | 사망 4 | ||
17 | 11.11 | 죽령 3차, 소백산 | 동사 1,포로 1 | ||||
18 | 11.26 | 단양 영춘 유치 | 패배 | 사망 60, 부상 35 | |||
19 | 11.28 | 단양 영춘 백자동 | 사망 2 | 사망 100 | 사망 7 | ||
20 | 12.16 | 단양 복성동 | 포로 10, 사망 7 | ||||
21 | 12.25 | 영월 서면 전동 | 사망 3, 부상 2 | ||||
22 | 1908.1.6 | 화천 남천 | 사망1, 부상2 | 사망 4 | |||
23 | 3.19 | 가평 용소동 | 사망 100 | ||||
24 | 3.22 | 가평 대청동 | 가옥소실 18 | 사상자 다수 | |||
25 | 3.28 | 포천 청계산 | 격퇴 | ||||
26 | 4.12 | 인제 백담사 | 사상자 10 | 사망 100 | 사망 10 | ||
27 | 4.29~30 | 강릉 하사동 | 사상자 다수 | ||||
28 | 5.2 | 홍천 북면 | 격퇴 | ||||
29 | 5.3 | 양양 백사장 | 사상자 다수 | ||||
30 | 5.17 | 봉화 서벽 | 사상20여명 | 행방불명 4 | |||
31 | 5.18 | 봉화 내성 | 사망 다수 | 사망 20 | |||
32 | 6.4 | 봉화 재산 소내골 | 사망 10, 부상 8 | 사망 10 | 사망 5 | 사상자 70 | |
33 | 6.21 | 제천 오미리 | 주민 피해 2 | ||||
34 | 7.2 | 제천 적성 | 포로1(이강년) | 사망 7 | 포로(이강년) |
후기의병
서울진공작전과 산악전의 전개
1907년 12월, 전국 대표 의병장들은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13도창의군을 편성하였고 운강은 호서창의대장에 편성되었다.
운강의병부대는 1907년 12월 말부터 서울진공작전을 위해 강원도 지역으로 우회하여 경기 동북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강의병부대는 1908년 3월 19일 가평 용소동과 3월 28일 포천 청계산 갈기동에서 적과 전투를 하여 승리를 거두며 서울쪽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에 나섰던 13도창의군이 해체되자 운강의병부대는 서울 · 양주지역의 진출을 포기하고 강원도 지역으로 부대를 옮겼으며,
4월 12일 인제 백담사와 5월 3일 양양 백사장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다.
한편, 운강은 의병전쟁을 보다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남쪽으로 부대를 이동하기로 하고 태백산맥을 따라 경상도로 남하하였다.
그리고 5월 16일에는 봉화 서벽에서, 5월 18일에는 봉화 내성에서, 6월 4일에는 봉화 재산 등에서 적을 물리치는 등 6월말까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적과 수차례 접전을 벌여 커다란 전과를 거두었다.
이강년의 피체와 순국
1908년 6월 이후부터는 일본군의 의병토벌작전이 강화되면서 운강위병부대의 활동도 여의치가 않았다. 운강은 측근 참모 몇 명과 함께 의병부대의 전열을 수습 · 보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본군은 1908년 6월 25일부터 수비대·헌병대·토벌대·경찰대 등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의병 토벌작전을 실시하여 가공한 의병 학살과 의병 근거지 초토화작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마침내 7월 2일 운강의병부대는 청풍의 금수산 작성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적의 탄환을 복사뼈에 맞은 운강은 움직일 수 없어 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운강은 피체 후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의병장으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잃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체포된 직후 일본군들이 그의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또 충주에 일시 감금되어 있을 때 주민들에게 거의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죽어서도 항일전이 부단히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였다.
1908년 10월 사형집행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도 고결문(告訣文)을 남겨 국민들에게 국권수호에 더욱 매진할 것을 당부하였다. 마침내 1908년 10월 13일 운강은 아들 승재와 사촌 강수에게 유서를 남기고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로써 태백 ·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경상, 충청, 강원 및 경기 일원에서 의병전쟁으로 명성을 드높인 운강의병부대는 무너지고 13년 전장의 삶도 최후를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