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와 신립장군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란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가 서울에 도달하자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모병 대적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 이일 장군을 상주에 급파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이 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에서 남하하는 신 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 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하여 방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제하는 신 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 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하고 있었다.
그 때에 신 장군의 소식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한 처녀의 원귀가 장군앞에 나타나 "신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 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 장군과 전 장병은 순사 대패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