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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학 교우촌

  • 주소 문경시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배교자의 밀고로 순교자를 낸 문경시의 최북단 교우촌

문경시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제천시 덕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곳에 건학 교우촌이 있었는데, 병인박해 때 배교자의 탐욕과 밀고로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이 시몬이 순교하고 교우촌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건학 교우촌이 있던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 점터는 원래 예천군 동로면 지역으로 1895년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건학(乾鶴)이란 마을 이름도 마을 주위에 있는 산의 형상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상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주민들은 보통 거느기라 부르고 있다.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박해 초기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산지를 개간하여 생계를 유지하였고 또한 옹기를 구었던 확실한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으나 이들이 처음 살았던 곳을 점터라고 부르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에 처음 박해의 손길이 닿은 것은 아마 1827년 정해박해 때로 추측된다. 즉 기록에 의하면 순교자 박경화(관명 도항, 朴甫祿, 1757~1827, 바오로)는 바로 이웃 고을인 충청도 단양군 대강면 남천리의 가매기에 살다가 상주 멍에목으로 이사하였다가 몇 주일 후에 체포되어 상주 진영을 거쳐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옥사했고, 아들인 박사의(朴士儀, 일명 사심, 1792~1839, 안드레아)는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했다.

그런데 이 멍에목은 바로 건학 이웃의 자연 부락이며 현재 같은 동로면 명전리에 속한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 몇 달 전인 1865년 가을, 예천 고을에 살던 양반 계급의 냉담자인 황가는 품행이 고약하여 다른 도둑들과 짜고 여러 고을의 교우촌을 유린하였다. 교우들이 합심하여 퇴치하자 원한을 품고 포졸을 앞세워 월악산 밑 부럭이 마을의 존경받고 가사가 넉넉한 박 프란치스코 가정을 덮쳤다. 박 프란치스코는 미리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고, 그 마을에 사는 다른 신자들이 잡혀 갔다.

이때 잡혀 간 부녀자와 아이들을 구하고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전 하비에르와 여우목[狐項里] 성 이윤일 요한 회장의 아들인 이 시몬이 이들을 뒤쫓다가 오히려 포졸들에게 잡혀 예천 관장에게 잡혀 갔다. 공주 감영으로 이송 후 관장은 곧 사형 선고를 내렸고 복잡한 절차와 지연을 피하기 위하여 옥중에서 교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곧 1865년 12월 10일경(음)에 두 순교자는 치명하니 전 하비에르는 나이 49세요, 이 시몬은 24세였다.

1866년 병인박해 전,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는 한실을 중심으로 부근의 건학, 부럭, 여우목, 사실 신자촌과 백화산 너머 충북 연풍 등지에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65년 12월 1일(음)에는 부근의 건학 신자촌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 마침 그 몇 주일 전에 순교한 전 하비에르의 부인과 아들이 미사에 참례하고 순교자를 위해서 미사를 청했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 마을에 살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피난을 떠났다.

순교자
전 프란치스꼬 사베리오(1816∼1865)

전 프란치스꼬는 한국 천주교가 들어올 때부터 신앙을 받아들인 중인(中人) 집안의 구교우 가정으로 충청도 내포지방 출신이었다. 그의 부친은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 훌륭하게 교회에 봉사하였고 그도 부친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그는 충청도에서 살다가 칠곡 한티로 피난가서 살았으며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대구 부근의 달비골(달서구 상인동)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건학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으며 아내와 세 자녀와 더불어 조용히 살았다. 그리고 알려진 지식과 온화한 성격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성으로 모든 사람들의 애정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었다.

이 요한 시몬(1841∼1865)

이 요한은 여우목 회장인 이윤일 회장의 아들로 3대째 구교우 집안이며 고향은 충청도 내포지방이다. 중인(中人) 집안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이며, 벌써 3명이 순교 월계관을 받은 순교자 가문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부친도 명망이 높은 분으로 몇 달 후인 1867년 1월(양)에 순교하여, 103위 성인이 되었다. 이 요한은 신자촌을 두루 다니며 신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던 예천의 황가라는 사람에 의해 포졸에게 체포되어 관아로 끌려갔다가 공주 감사에게 압송되어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으므로 옥중에서 교살 당하여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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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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