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뉴 열기

문경시

검색
사이트맵 보기

전통문화

긍정의 힘! YES 문경!

마원성지

  • 주소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599-1

신부님과 신자의 우정을 기리며 조성된 순교자 박상근의 유해를 모신 성지

마원 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문경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 교우들에 의해 형성된 교우촌으로 병인박해 당시경상도 북부 지역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칼레 신부를 모시며 신앙생활을 했던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의 유해가 모셔져있는 곳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님을 모신 일화가 남아 있다.

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하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고향과 가산을 버리고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영남 북부의 험준한 산악 지대는 눈을 피해 은신하기에 적합했다. 문경, 한실, 여우목[狐項里], 건학, 부럭 등 이러한 곳들은 신앙의 선조들이 화전을 이루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유서 깊은 장소들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이곳에 숨어 살던 교우들 가운데 40여 명이 붙잡혀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30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교한 박상근(1837~1866, 마티아)은 문경 토박이로 아전이었다고 전해지며 그는 아마도 신유박해 이후 이 지방으로 숨어든 충청도의 신자들과 접촉을 하게 되면서 지방인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입교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의 전교 기록에 보면 문경에서 가까운 백화산 중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 신자 집이 서너 집씩 무리 지어 산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 신자들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칼레 신부는 그의 출중한 신앙심과 죽음을 무릅쓰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은신시킨 용기에 대해 치하하고 있다. 결국 병인년 12월에 체포된 그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문경 현감의 간곡한 배교 권유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였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발굴된 것은 1985년 9월의 일이다.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 대대로 내려오는 묘가 있었는데 여러 정황과 증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이 묘가 《치명일기》에서 말하던 순교자 박 마티아의 묘인 것으로 확인됐다. 안동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키로 결의하고 유해를 모신 데 이어 다각적인 성지 개발 계획을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순교자의 뜻을 기리기 위한 현양 대회를 꾸준히 실시하고 있다. 125위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 중의 한 분으로 ‘하느님의 종’으로 불린다.

박상근과 깔레 신부의 일화

경북의 사도 깔레(Calais) 강 신부(1833∼1884)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1860년 7월 5일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4월 7일 한국에 입국, 1866년까지 5년 동안 경상도의 서부 지역에서 전교 활동을 벌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여러 차례 위험을 넘기고 산속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페롱 신부와 함께 한국을 탈출, 중국으로 피신하였고, 이듬해부터 여러 번 한국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부득이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869년 4월 시토회 수도자가 되어 모벡(Maubec) 수도원에서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일생을 마쳤는데, 그 당시 전교 하면서 쓴 선교 체험기가 귀중한 자료로써 남아있다. 그의 선교 체험기 중에서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와의 우정을 기록한 글이다.

“한실 윗산까지 가려면 이제 20리 정도 남은 것 같소. 나 혼자서도 거기까지 갈 수 있을 것이오. 마티아는 너무 지쳤으니 이 근처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을 얻도록 하시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신부님도 잘 모르시는 이 산속에 신부님만 혼자 가시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한실도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면 신부님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신부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도 가겠습니다. 신부님이 이 깊은 산속에서 돌아가신다면 저도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마티아는 대답하였다.

이처럼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게 되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이른 마티아를 더 이상 고생하도록 내 버려 둘 수 없었던 깔레 신부는 본 마음과는 달리 준엄한 명령조로 마티아에게 말했다. “마티아, 나는 당신에게 명령합니다. 당신이 가져온 마른 과일의 반은 당신이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내게 넘겨주시오. 그리고 내 말에 복종하시오!”

이 말을 듣자 마티아는 통곡하면서 강 신부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 신부님도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서로 굳은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졌다. 강 신부는 산길을 계속 갔지만, 마티아는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강 신부를 울며 바라보고 있었다.”

순교자
순교자 박상근 마티아(1837∼1867) <하느님의 종 125위>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하급 관리)을 지낸 사람으로,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리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였다. 또 관청에 있었으므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깔레(Calais, 姜)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깔레 신부가 숨어 있던 한실(현 경북 문경군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가 깔레 신부와 함께 문경읍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신부를 숨겨 주었다.

3일 후 마티아는 깔레 신부와 둘이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깔레 신부는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른 뒤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울면서 따라가서 도와드리기로 애걸했으나 결국 깔레 신부의 명에 순종하여 그와 이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마 후 숙모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다. 상주 옥에는 문경 인근에서 끌려온 교우들이 많이 있어 권면하였고, 많은 교우들이 여기에 용기를 얻어 순교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찾아오시는 길
페이지 담당자
  • 문화예술과 (054-550-6061)
최종 수정일자
2020-11-10
페이지 만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