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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재 돌마래미 교우촌

  • 주소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 돌마래미

하느님의 종 김윤덕이 태어난 박해 초기의 교우촌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고 청송 노래산 교우촌으로 피난을 갔다가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대구 감영에서 형벌과 고문의 여독으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저음리’란 말은 깊은 두메 산골에 산돼지가 많이 나와 시끄럽게 울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돛마래미로 부르다가 후에 돌마람(저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은점재(은재)는 자양산(428m)의 저음리와 안룡리 사이에 있는 고개 마을로 문경시 가은읍과 상주시 이안면과 경계선에 접해 있다.

이곳에 천주교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것은 아마 배모기의 서광수(徐光修, 1715~1786) 가정으로부터 순교자 김윤덕( ?~1815, 아가타 막달레나) 가정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시초인 듯하다. 그 후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에 청송 노래산(청송군 안덕면 노래동)으로 피난을 갔다가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다.

이때 “무식하기도 하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하느냐.” 하고 관헌이 물으니, 그는 “아무리 무식하고 아무리 비천하다 하더라도 조물주 천주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항구심은 변함없어 다른 증거자들과 같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로 신앙을 배반하여 석방되었으나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金宗漢, 보명 漢鉉, ?~1816, 안드레아)을 만나 그의 권면으로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배교를 취소하자 심한 매질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들어가자마자 고문의 여독으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이때가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가량이었다.

그 뒤에도 저음리에는 남인파에 속한 홍현만 바오로(홍 루카의 고조부)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이곳으로 낙향해 살다가 박해를 만나 상주시 모등면 백화산 마루의 보문으로 이사를 가는 등, 많은 신자들이 이곳 저음리에서 대대로 신자촌을 이루며 살았다.

은재는 교통상 이안의 신자촌들이나 문경 한실 부근의 신자촌들과 연결되는 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지금은 깊은 산골 마을로 이곳에 살던 신자들이 모두 떠나 버리고 한두 집밖에 신자들이 살고 있지 않지만, 최근까지는 가은 본당의 공소가 있었다.

순교자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 ∼1815년) <하느님의 종 125위>

경상도 상주의 은재(현 경북 문경시 가은읍 저음리 )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였다. 그리고 노래산 교우촌(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대구로 이송되었다.

혹독한 형벌로 신앙을 배반하여 석방되었으나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안드레아)을 만나 그의 권면으로 신앙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갔다. 배교를 취소하자 심한 매질로 뼈가 허옇게 드러나게 되었다. 의식을 잃은 채 옥으로 들어가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때가 1815년 4월 말 혹은 5월 초로,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 가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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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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