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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관아와 객사

  • 주소 문경시 문경읍 상리2길 1-5 (상리 351)

병인박해 때 여우목 성지 교우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곳

문경 관아는 병인년 11월 여우목 마을의 교우 30여 명을 체포하여 3일간 혹형과 고문을 가한 곳이다. 동헌은 이제 주춧돌만 남아 운동장에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객사 건물 관산지관(冠山之館)은 박해 당시 너무 많은 신자들을 체포하여 옥이 넘쳐 이곳에도 가두어 놓았던 곳이다.

1866년 11월 18일(음 10월 12일)에 문경 관아의 포졸들은 여우목에 들이닥쳐 당시 회장인 이윤일(속명 제헌, 1823~1867, 요한)성인을 비롯하여 그의 부인, 큰 며느리(공주에서 순교한 이 시몬의 처)와 아들 하나, 그 외 3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하여 문경 관아로 압송하여 갔다. 문경은 그 주변에 많은 교우촌들이 있어 박해 때 마다 많은 신자들이 문경 관아에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여우목 성지는 이윤일 요한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우촌이다. 부근의 교우촌인 ‘건학’과 ‘부럭이’는 산길로 불과 20~30리 내에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 교우촌은 처음부터 서로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서로 도와가며 열심한 교우촌을 이루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이윤일 성인은 문경 관아에 잡혀 온 후 교회의 두목이라 해서 한실 공소 김 회장과 함께 경상 감영이 있는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21일에 대구 관덕정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

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하게 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고향과 가산을 버리고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문경, 한실, 여우목, 건학, 부럭 등 여러 곳에서 화전을 이루어 교우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기 때문에 박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문경 관아에서 신앙을 증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경 관아는 종6품의 현감을 그 관장으로 하는 문경현의 관아로서, 군사적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상주진관(尙州鎭管, 종3품의 첨절제사 진영)에 속하는 종6품의 절제도위(節蹄尉)가 파견되어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대체로 현감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배교를 거부하는 주요 신자들은 상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진영장(鎭營將, 정3품직)을 겸임하던 첨절제사에게 신문을 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관산지관은 문경서중학교 운동장 우측 모서리 약간 높은 곳에 남향하고 있다. 원래 주관과 부속관인 좌·우익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관과 좌익사만 남아있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인조 26년(1648년)과 영조 11년(1735년)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군 청사와 문경서중학교 건물로 이용하였다.

관산지관(冠山之館)

좌·우익사우익사의 철거 연대와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주관(정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좌익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두 건물이반 칸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좌익사는 왼쪽에 1칸 마루를 두고 그 오른쪽에 반 칸 규모의 툇마루를 들인 1칸 온돌방을 앉혔다. 마루는 개방되어 있고 온돌방은 정면과 좌측면에 쌍여닫이 굽널띠 살문이 나 있다. 이는 우리나라 객사의 전형적인모습이기도 하다.

경상우도(慶尙右道)

조선 중종(中宗) 때 경상도를 양분하여 서울의 임금이 보았을 때 그 오른쪽 지역(실제 지도상에서는 서쪽)에 속하는 여러 군(郡)을 통칭한 행정 구역이다. 성주·선산·금산·개령·지례·고령·문경·함창 등(이상은 尙州鎭에 속함)과 합천·초계·함양·곤양·남해·거창·사천·삼가·의령·하동·산음·안음·단성 등(이상은 晉州鎭에 속함), 그리고 창원·함안·거제·고성·칠원·진해·웅천 등(이상은 金海鎭에 속함)의 28군을 우도라고 하였다.

순교자
성 이윤일 요한 (1823∼1867)

‘제헌’으로도 불렸던 이윤일은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의 태중 교우로, 경상도 문경의 여우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에 이르자 그 해 11월 가족, 마을 교우 3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 관아에서 사흘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은 뒤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고, 상주에서 한 달에 세 번씩 석 달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고 나서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대구 감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여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며 지내다가,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아 4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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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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