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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성지

  • 주소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92-6

증거자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곳

진안리는 영남의 관문인 새재와 이화령 고개 갈림 길에 위치해 있으며 사목 보고차 서울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최양업 신부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성지다.

12년 동안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포교 활동을 한 위대한 사목자의 선종지다.‘새재’라고 하는 조령(鳥嶺)은 옛날 영남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다. 그러므로 조선조 숙종 34년(1708년)에 영남의 현관인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하였다. 제1 관문인 주흘관, 제2 관문인 조곡관, 제3 관문인 조령관이 서 있는데 각각 약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렇게 이 지방이 충북과 경계를 이루는 영남의 관문이기에 과거 보는 과객(科客)은 물론, 최양업(崔良業, 1821~1861, 토마스) 신부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선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구교우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는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서 최방제(崔方濟, 일명 과출이, 1820?~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가서 신학 공부를 한 뒤 한국 교회에서는 김대건 신부에 이어 두 번째로 1849년 4월 15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해(1849년) 12월 변문을 떠나 입국에 성공하였다. 실로 마카오 신학교를 떠나 조선 귀국을 시도한 1842년 6월부터 계산해 볼 때, 그 다섯 번째 시도로 7년 6개월 만에 입국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2년 동안 매년 5,000~7,000리를 걸어 다니거나 또는 말을 타고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교우촌과 외교인들이 살고 있는 반촌과 빈촌을 사도 바오로처럼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도 찾아 다녔고 그렇게 열심히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59년 말부터 1860년 경신박해를 맞아 경남 언양의 간월산 동굴에서 3개월간 피신을 하였다.

마침내 1860년 8월 박해가 끝난 후에 매일 80~100리를 걸으면서 밀린 교구 방문과 사목 활동을 하고서 그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서울의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가 문경 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넓은 갈림길인 문경시 진안리의 오리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와 장티푸스의 합병증으로 문경읍내 교우 약국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6월 15일 40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선종하기 전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가 병자성사를 주었다. 최 신부의 시신을 푸르티에 신부의 지도로 상여를 꾸며 배론으로 운구하여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뒷산에 안장하였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

같은 시기의 선교사들의 서한에도 구체적인 장소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대의 증언 자료를 가지고 선종 지역을 추정하는데, 현재까지 문경이었다는 주장이 대세였지만 청주교구 진천군 지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문경 지역 내에서도 문경 새재의 주막이 있던 진안리와 문경 읍내 약국 이씨 집에서 선종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설에는 최 신부가 문경에서 발병하였으나 말을 타고 배티 또는 진천군의 어느 교우촌까지 버티며 가서 결국 그곳에서 선종하였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관련된 논란은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 2007년 12월에 펴낸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에 상세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순교자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 <하느님의 종>

우리나라 제 2대 방인 사제, 1821년 3월 1일 충청도 다락골 출생,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마카오 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 1844년 김대건 신학생과 신학 과정을 끝낸 뒤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부터 입국을 시도하였다. 1849년 4월 15일 강남교구장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신부가 되었다.

7년 6개월 동안 5번의 입국을 시도하여 성공하였으며 사목활동 12년 만에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로 선종 하였다. 19통의 라틴어 서한 <한국 순교자전> 을 번역 교황청에 올려 가경자가 되게 했고, <성교요리 문답>, <천주성교공과> 등 교리 문답서나 기도서를 간행하였으며 그밖에 다수의 천주가사를 저술했다. 초대 성 김대건 신부에게는 피의 순교 정신, 2대 최 신부에게서는 땀의 순교 정신을 배울 수 있다.

페이지 담당자
  • 문화예술과 (054-550-6061)
최종 수정일자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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