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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실 교우촌

  • 주소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

15명의 순교자를 낸 깔레 신부의 사목 중심지

한실 교우촌은 칼레(Calais, 姜, 1833~1884, 아돌프) 신부가 병인박해 때 백화산을 넘어 문경과 연풍 등을 다니면서 전교에 심열을 기울였던 사목의 중심지였다. 병인박해 때에는 한실 신자촌과 부근의 신자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순교자 중 15명은 한실에서 체포되어 온 신자들이었다.

문경시 문경읍 상내리에 위치한 한실 교우촌은 백화산 서북부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한실 뒷산을 넘으면 바로 충북 괴산군 연풍 성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좌편에 뇌정산(991m), 우편에 문경 새재와 조령산(1107m)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자연적인 요새의 특성을 갖추었기에 임진왜란 때 피난처가 되었고 박해 시에 은둔처가 되어 신유박해(1801년) 때부터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곳 한실에 처음으로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후에 상주 이안면 배모기에 살던 서광수(徐光修, 1715~1786)의 다섯째 아들인 서유도의 가족들이 이곳 한실 잣골에 피난 와서부터라 생각된다. 그리고 1812년과 1813년에 충청도 홍주와 연산의 황 바오로, 원 베드로 등 신자 몇몇이 공주에서 순교할 때 경상도에서도 사사로운 군란이 있어, 이곳 한실에 피난 와서 살던 서유도의 부인 전주 이씨가 순교를 했다고 한다.

점차 신자촌의 규모가 커지면서 1866년 병인박해 전 칼레 신부는 이곳을 중심으로 부근의 건학, 부럭, 여우목, 사실 신자촌과 백화산 너머 충북 연풍 등지에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며 전교 활동을 하였다. 1865년 12월 1일(음)에는 부근의 건학(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신자촌에 성사를 주러 갔을 때 마침 그 몇 주일 전에 순교한 전 하비에르의 부인과 아들이 미사에 참례하고 순교자를 위해서 미사를 청했다.

병인박해 때에는 한실 신자촌과 부근의 신자촌에서 많은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문경에서 잡힌 이재현, 김레기, 김민기 등이 1867년 1월 4일 효수형을 받았으며, 또한 상주 아문에서도 각 교우촌에서 체포되어 이송되어 온 신자 23명과 한실에서 체포되어 온 서 베드로, 김 아우구스티노, 김 토마스, 김 아우구스티노, 김 안토니오, 김 베네딕도, 김 빈첸시오, 김 프란치스코, 김 생원, 또 다른 김 생원, 장 서방, 장 서방 부인, 김 요셉, 김 베드로, 모 막달레나 등 15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그 후 한실 신자촌은 점점 쇠퇴해져 갔으며, 1893년 동학난 때는 부근에 살던 신자들이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 또한 이곳이 얼마간 동학도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한일 합방 이후 이곳을 떠나 버려 전부 폐허가 되었고, 대신 문경의 가은읍의 먹방이와 도탄 등에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경상도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증손으로 충청도 장원에서 나서 문경 여우목으로 피난가서 얼마동안 살다가 풍기, 상주, 대구 등을 거쳐 병인년 봄에 한실로 피난을 갔다가 그해 겨울 문경 포교에게 온 가족이 잡혀 문경 아문을 거쳐 상주 아문으로 이관되었다. 부인 김 데레사는 감옥에서 딸 마리아를 해산하여 석방되었으나 함께 석방된 그의 7세된 아들은 굶어 죽고, 서태순도 옥중에서 배가 고파서 소 여물을 먹기도 하였다. 그해 12월 18, 19일에 순교하였다. 부인 김 데레사와 옥중에서 탄생한 외동 딸 서 마리아는 동정녀로 나중에 대구교구 설립 초창기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김 아우구스티노

그는 고향이 청주 갈매골 사람으로 한실로 이사를 와서 살다가 병인박해 때 다른 많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상주 아문으로 이송되어 그해 음력 12월 18, 19일에 62세로 순교하였다.

김 토마

김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부친과 같이 순교하였다.

김 아우구스티노

김 아우구스티노의 종손으로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베네딕도

김 아우구스티노의 종손으로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빈첸시오

김 아우구스티노의 종손으로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안토니오

김 아우구스티노의 종손으로 그의 종조부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 프란치스코

아우구스티노의 형제로 김 아우구스티노 보다 10일 후에 체포되었으나 함께 순교하였다.

김서방

김 아우구스티노의 조카로 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순교하였다.

김서방

김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조카로 김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순교하였다.

장서방

부부가 함께 잡혀 김 프란치스코와 함께 순교하였다.

장서방 부인

그 남편과 함께 순교하였다.

김 요셉

그는 본래 충청도 사람으로 한실로 이사와서 살았는데 동정을 지키기로 뜻을 세워 묵주 제작을 직업으로 삼았다. 병인박해 때 상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김 베드로

김 요셉과 사촌지간이다. 한실에 살며 김 요셉과 같이 동정을 지키기로 뜻을 세워 열심히 봉교하다가 병인년에 김 요셉과 함께 체포되 순교하였다.

모 막달레나

김 베드로의 모친으로 아들과 함께 잡혀 순교하였다.

안동교구 : 병인박해 순교자 서유형 유해 발굴
안동교구, 팔꿈치 뼈 등 문경 한실교우촌에 이장

교구설정 40주년을 맞아 순교자 현양사업에 본격 착수한 안동교구는 12일 병인박해 당시인 1865~1866년 경북 상주 감옥에서 순교한 서유형(바오로) 유해를 발굴, 문경 한실교우촌에 이장했다.

교구 성지개발위원회(위원장 남정홍 신부)는 이날 경북 상주시 함창읍 나한리 논둑 서유형 순교자 묘소에서 후손 10여 명과 사제 등이 모인 가운데 유해 발굴 작업을 벌여 12시간 여 작업 끝에 팔꿈치 뼈(10㎝, 폭 2.3㎝가량, 사진)와 다리뼈 일부 두 조각을 발굴했다.

성지개발위는 발굴된 유해를 안동교구청으로 옮기고 유해를 감쌌던 흙은 문경 한실교우촌에 이장한 뒤 '순교자 서유형 바오로'묘비를 세웠다. 함께 묻혔을 것으로 추정됐던 서유형의 형수 박 루치아 유해는 확인되지 않아 이장한 서유형 묘 옆에 가묘만 조성했다.

경상도 교회의 순교자들」과 「서문동성당 50년사」, 「교구전사」 등 사료에 따르면 순교자 서유형은 경상도 지방 첫 신자인 서광수의 친척으로 당시 평지리에서 큰 부자로 살았다. 1865년 10월께 가을농사를 마무리하고 지붕을 엮다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에 잡혀 상주 진영으로 끌려가 순교했다.

함께 잡힌 방사선 회장이 서유형에게 탈옥할 것을 권했지만 "순교할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언제 천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느냐"며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서유형 묘소는 3대에 걸친 후손들의 노력으로 1988년 발견돼 관리돼 왔으나 묘소 터가 다른 사람 소유의 땅이라서 이장이 불가피했다.

영남교회사연구소 마백락(클레멘스) 부소장은 "서유형 순교자는 관 없이 칠성판(七星板) 위에 시신이 올려진 형태로 매장된 것 같다"며 "순교자 묘소가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기에 역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번 순교자 유해 발굴은 교구의 두 번째 현양사업으로, 교구는 지난 5월 29일 경북 봉화 우곡성지에서 홍유한 선생 후손인 홍병주(베드로, 1798~1839) 성인 등 순교자 13위 현양비를 세운 바 있다.

남정홍 신부는 "지역 순교자 유해를 교구 차원에서 관리하고 현양사업을 할 수 있게 돼 40주년을 보다 의미 있게 지내게 됐다"며 "앞으로도 교구 내 치명자터 보존과 순교자 유해 발굴 등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4대 후손 서병찬(미카엘, 51, 청주교구 괴산본당)씨는 "고조 할아버지의 삶과 신앙을 교회가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며 "이름이 알려진 순교자 외에 무명 순교자들도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신자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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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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