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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긍정의 힘! YES 문경!

먹뱅이 교우촌

  • 주소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2491-4 (왕능 1리 280)

병인박해 후 새로이 형성된 문경 가은 성당의 전신 교우촌

병인박해 후 새로이 형성된 문경 가은 성당의 전신 교우촌이다. 방사선 요한은 공소를 자기 집에 설치하고 교인들이나 외교인들 중에 억울하게 재산이나 인권 침해를 당한 경우 적극 도와주었기 때문에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외교인들 상당수가 재산 보호를 위해서 교회에 입교하였다.

문경 지방에서 옛날 박해 시대 때의 교우촌들이 모두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거의 몰락해 버리자 부근에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병인박해 중인 1869년경에 방사선 요한에 의해서 가은 왕릉리 먹뱅이에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그의 집안이 언제 어떻게 하여 천주교를 믿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박해 때 부모를 잃고 경남과 전라도 등지로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문경의 산다리(동로면 생달리)와 연풍 흰다리(현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문지 마을) 등지를 거쳐서 이곳 먹뱅이에 정착하였다.

그러고는 1869년 신자 7가구가 모여 방사선 요한을 중심으로 공소를 시작하였다. 공소를 자기 집에 설치하여 주일 첨례를 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공소 예절 시간에는 마장산 범바위까지 감시인을 보내어 경계를 강화하면서 예절에 임하였다고 한다. 차츰 혹심했던 박해가 조용해지자 그는 이곳뿐 아니라 점촌, 상주, 예천 지방 등을 다니면서 열심히 전교 활동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상주의 이안면 아천의 이복영과 점촌의 포석골 황범인 베드로 가정 등 많은 신자들을 입교시켰다. 그의 전교 활동에 있어 특기할 것은 그는 전교 활동뿐 만 아니라 당시 구한말에 교회의 전교 신부들에게 나라에서 부여한 특권을 잘 이용하여 교인들이나 외교인들 중에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인권 침해를 당한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잘 처리해 주었다. 그리하여 못된 관리들이나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던 외교인들 상당수가 재산 보호를 위해서 교회에 입교하였다

교세 통계표(1885~1886)에 의하면 초대 대구 본당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는 공소의 신자 수가 69명이나 되었다. 그 후 1896년부터는 김천 본당 김성학(金聖學, 1870~1938, 알릭스) 신부가 와서 성사를 주었고, 1901년에는 김성학 알릭스 신부가 기와집 한 채를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하였으며, 1907년부터는 도탄리(현 왕능 4리)로 공소를 이전하고 충북 옥천 본당에 편입하였으며 홍병철(洪秉喆, 1874~1913, 루카) 신부가 신자들을 사목하였다. 1922년부터는 점촌 공평 본당에 편입하고 김문옥(金紋玉, 1873~1941, 요셉) 신부가 각각 사목을 담당하였으며 신자 수는 불어나서 20여 호가 되었다고 한다.

1941년 가은읍 왕능 1리로 공소를 이전하였으며 1957년 5월 28일에 현 본당 위치에서 본당으로 승격되고 초대 본당 주임 신부로 지인수(Ernst Siebertz) 신부를 모시고 가은 성당이 세워졌다. 가은 성당에서 6명의 성직자와 9명의 수도자가 배출되었다.

문경 석탄 박물관

1999년 5월 20일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옛 대한석탄공사 은성광업소에 개관한 전문 박물관이다. 연탄 모습으로 꾸민 외관이 독특하다. 부지 5만 136㎡, 연면적 1805.44㎡ 규모로 1∼2층 중앙 전시실과 갱내 전시실·야외 전시장 등의 시설이 있다. 광산 장비 및 광물 787종 4,571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실제 갱도 230m도 전시 공간으로 활용된다. 은성광업소는 1938년부터 1994년까지 석탄을 캐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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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예술과 (054-550-6061)
최종 수정일자
201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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